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팔라비 왕조 (문단 편집) ==== 민족주의 ==== 팔라비 2세는 1965년 9월 이란 국회에서 '[[아리아인]]의 영광'을 뜻하는 '아리야메헤르(آریامهر)' 칭호를 받았고[* 원정팀의 무덤이라는 [[테헤란]]의 아자디 경기장의 원래 이름도 아리아메르 경기장이었다.] 동시에 이란 민족 의식을 고취했다. 그동안 '가난한 나라에 황제는 어울리지 않는다'며 사양해 오던 샤한샤(샤 중의 샤, 왕중왕 즉 황제) 칭호를 1967년 10월 대관식을 올리면서부터 쓰기 시작했다.[* 부황 레자 샤도 재위 기간 내내 샤 칭호를 써오다 후반 6년 동안 샤한샤 칭호를 썼다. 뒤를 이은 팔레비 2세는 샤한샤 칭호를 그대로 이어받지 않고 20년 넘게 샤 칭호를 사용하다 다시 샤한샤 칭호로 바꾸었는데, 당시 이란의 군주 칭호가 썩 일관되지 못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대외적으로는 1925년부터 이란 제국(Imperial State of Iran)으로 불리고 있었으며 국제적으로도 황제 폐하(His Imperial Majersty)라는 경칭으로 불리고 있었기에 샤든 샤한샤든 둘 다 황제의 의미였으며 샤한샤 대관식은 철저히 내부 권위 확립용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이란은 한국의 우호국임에도 불구하고 한국 언론에서는 팔레비 2세를 황제보다는 국왕이라는 호칭으로 번역하여 기사를 내오곤 했다. 샤를 국왕으로, 샤한샤를 황제로 해석해왔기에 단지 샤한샤를 칭한 기간보다 샤를 칭한 기간이 더 길어서였을 가능성이 높다. 다른 황제국 군주인 일본 천황의 경우에는 국민감정으로 인해 천황이나 황제가 아닌 일왕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였으며 6.25 전쟁 파병국인 에티오피아의 느구서 너거스트(왕중왕) 하일레 셀라시에에게는 일관되게 황제 호칭을 사용하였다. 하일레 셀라시에 방한 기념우표에도 '이디오피아 황제'임이 명확하게 표기되어 있다. 팔레비 2세가 스스로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진행한 샤한샤 대관식은 황제독재권 강화에 이용되었으며 나중에 팔레비가 퇴위하게 되는 나비효과로 이어졌다. 만약 그가 샤한샤를 칭하지 않고 샤에 머무르며 평범한 입헌군주를 지향했더라면 이란 제국은 계속 이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제국 대부분이 붕괴한 20세기에 굳이 샤한샤를 칭한 것은 팔레비에게 자충수가 되었다. 다른 제국인 에티오피아나 일본은 태초부터 황제로 칭해왔기에 세월이 흐르면서도 큰 잡음이 없었지만, 굳이 20세기에 대관식을 하여 국민의 지탄을 받은 사례는 이란의 팔레비 2세와 중앙아프리카의 보카사 1세가 유이했으며 이들 모두 좋지 않은 최후를 맞이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Mohammad_Pahlavi_Coronation.jpg]] 팔라비 2세가 1967년 10월 '샤'에서 '샤한샤'로 스스로를 높이는 [[대관식]]에서 찍은 사진. 1971년 고대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 제국]]의 유적 [[페르세폴리스]]에서 이란 건국 2500년 축하 행사를 개최했다. 이 행사에서는 다수의 국빈이 초청되었으며, [[에티오피아 제국]]의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 일본 [[쇼와 덴노]]의 동생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 등이 있었다. --제국 정모-- 동시에 [[키루스 2세]]가 기원전 539년 [[신바빌로니아]]를 멸망시키고, [[바빌론 유수]]에서 [[유대인]] 등 여러 민족을 해방하고 각각의 고향에 다시 그들의 성전을 재건했다고 기록된 키루스 원통인장의 복제물을 "세계 최초의 인권 선언"으로서 [[국제연합]]에 증정했다. 샤는 이 행사를 기념하여 수도 테헤란에 샤의 영광을 의미하는 "샤야드 타워"을 건설하고, 남쪽 마을에는 부황 팔라비 1세의 무덤을 건설했다. 샤아드 타워는 혁명 이후 자유라는 뜻에서 따온 아자디 타워로 명칭이 바뀌고, 팔라비 1세의 무덤은 흔적도 없이 개발살나서[* 다만 팔라비 1세의 유해는 훼손되지 않고 이집트 카이로로 보내졌다. 하지만 2018년에 팔라비 1세로 추정되는 유해가 이란에서 발굴되어 논란이 되었다. 현재는 다시 매장하였다고 한다.] 이슬람 신학교가 됐다. 1975년에는 셀주크 왕조가 만든 자라리력(曆)을 대신하여 이란력(曆)을 도입하고, 기원을 이슬람 사회의 히즈라를 대신하여 키루스 2세가 메디아를 멸망시킨 기원전 550년으로 잡았다. 일련의 사업에 투자된 비용이 1억 달러 이상에 달했으므로, 반체제적인 이슬람 율법 학자를 비롯한 여러 세력에게 낭비라는 비판을 받았다. 뭐 그런데 전성기에는 이 양반 개인 자산만 20억 달러가 넘었던 것 같다. 그래도 페르시아 제국 시절을 영광의 시대로 기억하는 여론은 나쁘지 않았기에, 오히려 이를 악마 같은 우상숭배라고 비난하던 호메이니가 신나게 욕처먹고 만다. 오죽하면 호메이니는 "여러분, 저는 낭비와 팔라비 2세의 자기 정권 우상화를 비난한 거지, 위대한 페르시아 시대를 모욕한 게 아닙니다!"라고 변명해야 했다.[* 이미 죽은 호메이니의 본심을 알 수는 없지만, 그가 이슬람 근본주의자였음을 생각하면 이슬람 전파 이전 페르시아 제국을 부정적으로 봤을 개연성은 크다. 그의 입장에서 아케메네스조나 사산조 등 이슬람제국 이전의 이란 왕조들은 이슬람교의 숙적이었던 [[조로아스터교]]를 국교로 삼았던 이교도들의 불경한 나라나 다름없다. [[이집트]]의 이슬람 근본주의자들 역시 비슷하게 이교도(이집트 종교)들의 우상숭배 유산인 [[피라미드]]와 각종 건축물들을 파괴하자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워낙 이것들에 엮인 관광수입이 많기에 받아들여지지는 않고 있다.] 1974년에는 [[1974 테헤란 아시안 게임]]을 개최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